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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루함이 선물한 관찰력

by 행하또 2025. 6. 21.

스마트폰은 출근길을 채우는 가장 손쉬운 도구입니다. 음악을 틀거나, 뉴스를 읽거나, SNS를 스크롤하다 보면 금세 도착지에 닿고 맙니다. 그 짧은 시간은 마치 뭔가 유익하게 활용한 듯한 착각을 주고, 지루함을 몰아내는 데 탁월한 역할을 해줍니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 문득 생각했습니다.
‘이 시간에 나는 정말 깨어 있는가?’
이 질문은 ‘스마트폰 없이 출근길을 보내보기’라는 작지만 깊은 실험으로 이어졌습니다.

그 실험은 예상과 달리 심심하고 불편하고, 처음에는 다소 불안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자 놀라운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지루함이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고, 오히려 그 안에서 무언가가 깨어나는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글에서는 스마트폰 없이 출근길을 보내면서 겪은 감각의 변화와 깨달음, 그리고 지루함이라는 감정이 어떻게 ‘관찰력’이라는 선물로 이어졌는지를 공유하고자 합니다.

 

 

지루함이 선물한 관찰력
지루함이 선물한 관찰력

 

 

불편한 공백 – 스마트폰 없이 맞이한 첫 출근길


스마트폰 없이 출근길에 나선 첫날은 시작부터 어색했습니다. 버스정류장에 도착해 시간을 확인하려다 시계를 꺼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지하철 안에서는 무언가를 꺼내려는 습관적인 손놀림이 허공을 가로질렀습니다. 사람들은 조용히 각자의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세상과 연결되어 있었고, 저만 낯선 사람처럼 공허한 손을 무릎에 올린 채 가만히 앉아 있었습니다.

이 낯선 공백은 생각보다 무거웠습니다. 뇌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원했고, 눈은 주변의 움직임을 따라가려 애썼습니다. 처음엔 불편했고, 조금은 창피했고, 심지어 무기력하게 느껴졌습니다. 이전까지는 늘 무언가를 보고, 듣고, 읽으며 이 시간을 보내왔기 때문에 그 공백이 생소하게만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자, 이 공백은 점차 무언가로 채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무엇도 하지 않을 수 있는 이 시간은 단순히 '지루한' 시간이 아닌, 마음을 관찰하는 시간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제 안에 어떤 생각이 오가는지를 더 자주 들여다보게 되었고, 무의식 중 피했던 불편한 감정이나 미처 정리하지 못한 생각들이 떠오르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거리의 풍경, 사람의 표정 – 관찰하는 눈이 열린 순간


스마트폰을 내려놓자, 그동안 무심코 지나쳤던 풍경이 하나둘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출근길에 마주치는 가게의 간판, 거리의 벽화, 버스 창밖으로 스쳐가는 나무들, 사람들의 걷는 속도와 얼굴의 표정들까지 — 이 모든 것이 ‘그 자리에 있었지만 보지 못했던 것들’이었습니다.

가장 먼저 변화가 감지된 건 청각이었습니다. 스마트폰으로 음악이나 팟캐스트를 듣지 않으니, 주변 소리가 생생하게 들렸습니다. 차가 지나가는 소리, 어린아이의 웃음소리, 멀리서 울리는 자전거 벨소리까지 그 모든 것이 일종의 ‘도시의 리듬’처럼 느껴졌습니다. 단조롭다고 생각했던 일상 공간이 사실은 다양한 감각의 층위로 가득 차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다음으로는 시선의 방향이 달라졌습니다. 무심코 걷던 골목길에서 계절의 변화를 알아차리고, 이전에는 스쳐 지나갔던 카페 간판의 문구에 눈이 멈췄습니다. 지하철에서는 사람들의 손가락 움직임, 신문을 읽는 중년 남성의 표정, 잠든 아이를 안은 엄마의 얼굴 같은 것들이 인상 깊게 다가왔습니다. 사람을 관찰한다는 것은 단순히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존재로 느끼는’ 경험이었습니다.

스마트폰 없이 출근하는 길에서 관찰력은 어느새 자연스럽게 깨어났습니다. 마치 눈앞의 현실이 다시 선명해지고, 저는 그 안에서 한 사람의 ‘관찰자’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눈을 열고 귀를 여니, 세상은 생각보다 훨씬 더 다채롭고 흥미로운 풍경으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지루함을 견디는 힘 – 사고의 밀도가 달라지다


출근길의 지루함은 피해야 할 불편함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사고의 여백이며, 일상의 흐름을 돌아보게 만드는 시간입니다. 스마트폰 없는 출근길을 통해 저는 이 지루함이 일종의 정신적 자극이라는 사실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스마트폰을 사용하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생각이 늘어납니다. 처음엔 단순히 오늘 해야 할 일을 떠올리는 수준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더 깊은 사고로 이어졌습니다. 글 주제가 떠오르기도 하고, 어제 있었던 인간관계를 반추하기도 하고, 해결되지 않았던 고민이 머릿속에서 천천히 풀려 나가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이는 단순히 ‘시간이 남아서’가 아니라, 그 지루함 속에서 정리되지 않았던 감정과 정보들이 하나둘씩 표면 위로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이전에는 스마트폰을 통해 외부 자극만 받아들이느라, 정작 내면의 흐름을 놓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자극이 사라지고 나니, 뇌는 더 능동적으로 사고하고 정리하고, 의미를 부여하려는 방향으로 작동했습니다. 이런 경험은 단순한 출근길을 ‘내면을 정돈하는 리추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또한, 스마트폰 없이 출근하면 ‘시간이 늘어난다’는 기묘한 착각을 하게 됩니다. 시계를 자주 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순간 도착지를 바라보며 “벌써?” 하는 감정을 느끼는 대신, “꽤 많은 생각을 했구나”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양적인 시간이 아니라, 질적인 시간의 밀도가 달라졌다는 증거였습니다.


스마트폰 없이 출근하는 일은 단순한 불편함을 넘어서 감각을 깨우고, 생각을 깊게 하며, 삶을 관찰하는 힘을 회복하는 시간입니다. 그동안 지루하다고 여겼던 순간은 사실 생각의 씨앗이 자라는 시간이며, 일상 속 풍경이 말을 걸어오는 시간입니다.

스마트폰이라는 도구는 분명 편리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편리함 속에서 삶의 질감을 놓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스마트폰을 잠시 내려놓고 출근길을 경험해보면, 익숙했던 거리에서 새로운 장면을 발견하고, 바쁜 하루에도 마음 한켠의 여유를 느낄 수 있습니다.

지루함은 반드시 피해야 할 감정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생각하고 느끼고 관찰할 수 있는 능력을 회복시키는 공간입니다. 스마트폰을 내려놓는 그 순간, 비로소 우리는 삶의 장면들과 눈을 맞추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작은 변화가, 하루를 바꾸고, 삶의 방향을 조금씩 바꾸기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