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드 한 장, 주사위 한 번에 담긴 천 번의 고민
보드게임을 한다는 건 단순한 오락이 아닙니다. 규칙 속에서 전략을 짜고, 다른 사람과 협력하거나 속이며, 때로는 우연에 기대고, 또 어떤 순간에는 치밀한 계산이 필요한 행위입니다. 단 한 번의 주사위 굴림, 단 한 장의 카드 뒤에 수많은 가능성과 긴장감이 숨어 있습니다. 이 모든 ‘경험’을 설계하는 이들이 바로 보드게임 디자이너입니다.
오늘은 보드게임 디자이너 직업에 대해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보드게임을 ‘놀이’로만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하나의 정교한 시스템 디자인입니다. 이 직업은 단순히 재미있는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것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게임의 규칙, 흐름, 밸런스, 리플레이성, 심지어 플레이어 간의 감정선까지 고려해야 하죠.
보드게임 디자이너는 일종의 감정 건축가이기도 합니다. 게임을 플레이하는 사람의 몰입도, 불안감, 기대, 승리의 쾌감, 실패의 좌절까지 — 모든 것이 디자이너의 의도와 설계 안에서 조율됩니다. 카드 한 장에 들어가는 텍스트의 길이, 게임판 위 보물상자의 위치, 종료 조건까지 모두 설계의 결과입니다.
어느 디자이너는 말합니다.
“우리는 사람들 사이에 발생할 감정을 코드 대신 카드로 짠다.”
게임 하나를 설계하는 데 짧게는 몇 개월, 길게는 수년이 걸리기도 합니다. 특히 상업 출시를 목표로 한다면 디자인 이후에도 수십 차례의 테스트와 피드백 과정을 거쳐야 하죠. 재미뿐만 아니라 공정성, 직관성, 확장성, 미적 요소까지 신경 써야 하니까요.
어떻게 하나의 보드게임이 탄생하는가?
보드게임 디자이너의 작업은 ‘아이디어 → 프로토타입 → 플레이테스트 → 수정 → 출시’의 긴 과정을 반복하는 일입니다.
① 아이디어 발상
보드게임의 출발은 ‘무엇을 경험하게 하고 싶은가?’라는 질문에서 시작됩니다.
예를 들어, 협력을 통해 우주를 탐사하게 하고 싶다거나, 상대방을 속이며 자원을 독점하는 느낌을 주고 싶다거나. 이 감정의 뼈대를 중심으로 게임의 테마(세계관)과 메커니즘(시스템)을 정합니다.
② 프로토타입 제작
이후 간단한 도구(카드지, 말, 주사위 등)를 이용해 첫 시제품을 만듭니다. 이 단계에서는 디자인보다 게임의 구조와 흐름이 자연스러운지에 집중합니다. 엑셀이나 파워포인트로 만든 임시 카드, 손으로 그린 보드, 일상 물건을 대체 말로 쓰는 경우도 흔하죠.
③ 플레이테스트와 수정
그다음은 반복적인 테스트입니다. 처음에는 디자이너 스스로 테스트하고, 이후엔 지인, 동료 디자이너, 보드게임 카페 손님, 게임 페어 참가자 등 다양한 대상과 플레이하며 피드백을 받습니다. 이 과정에서 “어디서 재미가 끊기는가?”, “밸런스는 맞는가?”, “초보자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가?” 등을 체크합니다.
④ 디자인 완성 & 상업화
마지막 단계는 일러스트와 편집 디자인을 더하고, 박스 구성, 설명서, 브랜드 연계 등 출시 가능한 패키지로 완성하는 일입니다. 이후 퍼블리셔와 계약하거나, 크라우드 펀딩(킥스타터, 텀블벅 등)으로 자금을 모집하고, 생산과 유통을 진행합니다.
국내에서는 대표적으로 ‘루미큐브’, ‘스플렌더’, ‘부루마불’처럼 잘 알려진 게임들이 있지만, 최근엔 국내 보드게임 디자이너들의 창작 게임도 해외에서 주목받고 있습니다. 단순히 외국 IP를 들여오는 수준을 넘어서, 한국만의 정서와 감성을 담은 창작 게임이 전 세계 보드게임 팬들에게 호평을 받고 있죠.
아날로그 게임의 부활, 그 중심에 선 디자이너들
디지털 게임이 주도하는 시대 속에서, 보드게임은 의외로 꾸준히 성장하는 콘텐츠입니다. 전 세계 보드게임 시장 규모는 매년 수조 원대를 유지하고 있으며, 팬층도 매우 다양합니다. 특히 코로나 이후, 집콕 문화와 함께 다시금 아날로그 게임의 가치가 재조명되며, 전 연령층의 관심을 끌고 있죠.
보드게임은 단순한 게임을 넘어 교육, 심리치유, 커뮤니케이션 훈련, 창의력 개발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됩니다. 실제로 초등학교에서는 보드게임을 수업에 활용하고, 심리상담 현장에서는 게임을 통해 내담자의 패턴을 관찰하기도 합니다. 이런 영역에서 보드게임 디자이너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단순한 오락 도구가 아닌, 의미 있는 경험을 설계하는 전문가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이죠.
최근에는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결합한 하이브리드 보드게임도 등장하고 있습니다. 앱과 연동되는 게임, 증강현실을 활용한 게임, IoT와 결합한 인터랙티브 보드게임 등 새로운 실험이 활발히 이어지는 중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새로운 흐름의 중심에는 여전히 ‘사람의 상호작용’을 설계하는 감각을 가진 보드게임 디자이너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이렇게 묻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게임판 위에서, 당신은 어떤 이야기를 살고 싶은가요?”
작은 상자 안에 담긴, 가장 깊은 인간의 본성
보드게임 디자이너는 게임을 만드는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갈등, 협력, 선택, 유혹, 실패와 성공이라는 수많은 감정의 장면을 설계하는 이야기꾼입니다.
디지털이 지배하는 세상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누군가의 눈을 마주치며 웃고 속고 생각하는 이 아날로그적 경험을 원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작은 상자 속의 세계를 디자인하는 이들 — 그들이 바로 보드게임 디자이너입니다.
그들이 만든 게임 속에서 우리는 때론 이기고, 때론 져보며, 또 다른 나를 발견합니다. 그리고 그런 경험이 쌓일수록, 우리는 점점 더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해하게 됩니다. 그것이야말로 진짜 좋은 게임이 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마법 아닐까요?